[손길신의 철길 따라 38화] 함평궤도 이야기

편집국 / 2021-09-03 15:53:56
[하비엔=편집국] 우리나라의 궤도는 1899년 서울, 1915년 부산, 1923년 평양의 전기궤도 전차에 이어 1927년 전라남도 함평의 가솔린궤도 가솔린 동차로 이어지는데 대도시가 아닌 함평군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솔린 동차가 운영되었으며, 1960년 폐지가 결정되자 주민들이 ‘궤도철거 반대 추진위원회’까지 구성하고 반대운동을 벌렸던 함평궤도의 역사를 찾아본다.

 

▲1924,1926년 신년축하광고

 

함평궤도는 일제강점기 함평우체국장, 함평군 재무주임, 제주 도서기(島書記 : 재직 시 1915년 제주휘보 3호에 ‘濟州島出稼海女’ 발표) 및 영광금융조합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4년 및 1926년 조선신문에 신년 축하 광고를 했던 일본인 에구치 야스타카(江口保孝)가 1926년 5월 25일 「호남선 학교역~함평 간 6.1㎞(1940.09.13.관보 거리 명시)궤도를 부설하고, 영업을 20년간 허가」하는 조건의 사설철도 허가를 받아(1926.06.03.시대일보), 1926년 말 부설공사를 마치고 1927년 1월 개통하였다. 

 

운임은 학교~동창(東倉 : 1914년까지 무안군 좌촌면에 속해 있던 이곳의 정부양곡 창고가 무안군 동쪽에 있다 하여 이곳을 ‘동창’이라고 부르게 됨) 간 보통석(並等) 5전, 특별석(特等) 10전, 학교~함평 간 보통 25전, 특별석 45전임이 1926년 12월 29일 경성일보에 보도되었다.
▲경성일보1927.1.12..- 경성일보-조선최초가소린궤도

 

1927년 1월 12일 경성일보의 ‘조선 최초의 가소린 궤도가 호남선 학교~함평 간 3마일 구간에 철도가 개통되어 10일 시운전 성적이 양호함에 따라 11일부터 운수영업이 개시되었다. 

 

정기 3왕복, 부정기 2왕복을 운행하는데 학교~함평 간 30분이 소요된다’는 보도 내용에서 일부 기록에 한국 최초의 경유 동차로 기록된 것은 잘못 알려진 기록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전기궤도를 포함하여 모든 궤도의 궤간이 1,067㎜인 것은 당시 일본철도의 궤간을 따른 것으로 경부선 부설을 시작할 때도 일본과 같은 궤간으로 부설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호남선과 연계운송 구간


1927년 12월 22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472호에 의해 국철 호남선 목포~송정리 간 각역과 함평궤도 함평역 간에 여객과 소화물 및 수하물의 연대 운송규정이 제정되어 192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어 상호 착・발 승차권 발매 등으로 국철과 승차권 공유 및 상호 운임정산 업무가 시작되었다. 


2월 20일부터는 연대운송 취급역에 광주역이 추가되었으며, 호남선 열차운행 시각이 변경되면 이에 맞춰서 함평궤도 운행시간표도 변경하여 국철 열차와의 연계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중외일보 1930년 1월 22일 자 보도 내용에 의하면 함평궤도의 지난 1개월간 수입이 3,000원으로 운영실적이 양호하다 하여 이용률이나 기여도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2월 7일 신문은 영업 확장을 위하여 철도 당국의 지원을 받아 나가사키(長坂)자동차부를 1만7백여 원으로 매수하여 2월 20일부터 신형 자동차로 학교~영광 간 여객운송과 학교~법성포 간 매일 1회씩 화물자동차를 정기 운행할 것이라 하여 함평지방 교통의 편리는 물론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라 했다. 

 

1930년 8월 27일자 중외일보는 재계 불황과 긴축방침에 따라 함평궤도는 지난 15일부터 함평~학교 간 승차 운임 25전을 20전으로 통 크게 인하하였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함평궤도의 가솔린 동차

 

후임 사장인 이와사키 마사오(岩崎眞雄)는 일제가 경의선을 부설할 때 임시군용철도감부 직원으로 입국하여 철도국과 총독부 기사 및 철도국 기계과장을 거쳐 용산공작회사 고문을 거친 철도전문가이다. 

 

1931년 8월 9일 조선신문은 용산공작회사에 주문 제작한 가소린 객차는 정원이 34명이며, 엔진을 중앙에 설치하고 앞과 뒤에 운전실이 있어 지금까지 시・종착역에서 입환하는 등의 번거로움 없이 취급이 편리하고 내용도 최신식을 채용하고 있으므로 승차도 편하고, 지방의 여행자에게 매우 호감을 줄 것이라는 내용을 보도하기도 하였으며 마사오사장은 1936년 경성궤도 사장 취임 후 이듬해 사망 하였으며, 함평궤도주식회사는 1940년 경성궤도주식회사에 합병되었다.

▲1949년신년, 3.1절 및 1950년신년축하광고


1946년 6월 2일 광주민보의 그간 하천공사로 1㎞ 구간에 운행을 하지못해 도중에서 승하차하는 불편으로 지방 발전에도 지장이 있었지만 지배인 최봉주씨의 노력으로 5월 27일부터 정상 운행하게 되었다는 보도와 1949년 신년축하 및 3.1절 축하 신문광고와 호남선 열차시각 변경에 따는 발차시간 변경(1949.04.09.호남신문) 1950년 신년축하 등 광고가 신문에 게재된 것은 함평궤도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지속적으로 운행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49.04.09 호남신문

 

1960년 10월 22일 운행이 중지된 것은 6.25 전쟁 후에도 계속 운행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 10월 30일 동아일보는 ‘궤도철거반대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철거 반대운동을 한 주민들은 34년간 운영되어오면서 교통량의 폭주로 국영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데 지난 21일부터 돌영 운행을 중단하고 철도를 뜯어 팔려고 한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간 함평궤도 주임으로 근무했던 당시 최봉주사장은 철도가 노후한데 다가 적자를 막을 길이 없어 철거한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신문 보도에는 당시 자유당 소속 모 국회의원을 통하여 1959년 12월 시가 4,500만환의 철도를 불과 497만환에 불법 불하된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설철도인 함평궤도의 하루평균 교통량이 통학생 350명, 일반상인 200명, 일반승객 2,400명과 화물 3톤가량이라는 내용을 함께 실어 지역 교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함평군공용버스

현재 해당 구간의 노반은 국도로 전용되었으며, 함평군의 공영버스가 함평읍과 함평역(옛 학교역)을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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