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 따라27화 ] 철도사(鐵道史)에서 찾아 본 억지춘양(春陽)

편집국 / 2021-03-02 14:09:03

[하비엔=편집국] 우리 속담에 ‘억지춘향’이라는 말과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있다. 

 

전자 ‘억지춘향’은 고전소설 ‘춘향전’에 뿌리를 둔 속담으로 1920년대 신문에도 가끔 인용되고, 1931년 발행된 월간지 ‘삼천리’ 제3권 9호의 ‘춤 잘 추는 서도기생 소리 잘 하는 남도기생’에서도 “... 사라저가는 키 적은 남도기생들의 추는 춤은 ‘억지춘향’같이....”라며, 인용되고 있어 예부터 일상적으로 사용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영춘선과 영암선

그러나 후자 ‘억지춘양’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949년 4월 8일 최초로 영주~철암 간 철도부설 공사가 시작 된 후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3년 9월28일 다시 시작하여 공사가 90%이상 진전된 상황에서 춘양면 출신 3대국회의원으로 당시 자유당 원내총무였던 ○○○의원이 법전~녹동 간 직선연결 계획이었던 철도를 춘양면소재지를 돌아가게 하여 춘양역이 탄생하여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탄생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그 사실여부를 철도역사에서 찾아본 결과를 정리해본다.

▲1945. 8.15일 현재 영춘선

 

먼저 경전선 춘양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1930년12월25일 남조선철도주식회사는 여수항~전남광주 간 경전선을 개통시키면서 전남 화순군 춘양면 화림리 이양~능주 사이에 설치된 춘양역(春陽驛)은 1944년 6월15일 영업이 폐지되었다가 1953년12월 25일 다시 영업이 시작된 후 1955년 7월 1일자로 석정리역(石亭里驛)으로 역명이 변경되었다.

 

영암선 춘양역은 조선철도주식회사가 1944년10월16일 영주~춘양 간 35.2㎞에 궤간 1,435㎜의 철도부설을 허가받았으며(1944.11.01.관보 5324호), ‘조선철도사’에 소개된 1945년 8월15일 현재 ‘조선철도일현표’에 영춘선 영주~내성 간 14.3㎞가 개업선으로, ‘조선철도약도’에는 내성~춘양 간 은 미 개업 선으로 기록되어 영춘선 공사가 진행도중 중단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19481228동아일보

영암선부설공사가 시작되기 전 1948년12월28일자 동아일보에 당시 교통부 총무과장 및 건설과장과 함께 사전 현지를 답사한 김진섭 특파원의 보도기사 중 『영주역을 중심으로 내성을 거쳐 춘양까지는 불과 38.3㎞이며, 영주를 기점으로 철암까지 90㎞구간에 광궤철도를 건설하는 것인데 응방산과 왕석산을 횡단하는 약7㎞가 가장 어려워 약 3개년을 필요로 하지만 영주~내성간은 일제시부터 약 9할 가량의 궤도부설까지 준공되었던 것이 1946년도 홍수로 약 4㎞가 유실되었다. 

 

내성~춘양 간은 70%가량 공사가 진척되어있으나 아직 대도와 교량의 미착수 부분이 있을 뿐이다』는 내용에서 춘양을 경유치 않고 법전~녹동 간으로 직결하려는 계획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1954. 6.30일 준공된 구 춘양역사

1999년 철도청 발행 ‘한국철도100년사’에 의하면 6.25전쟁 후 미 극동사령부와 일본매스컴들은 한국이 공사를 성공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우려하는 중에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원조를 받아 1953년 9월28일 공사를 재개하였다. 

 

▲1955. 7. 1일 봉성~춘양 간 개통식

총 연장 86.4㎞를 25개 공구로 분할하여 25개 토건회사 공사 감독을 위하여 영주, 봉성, 춘양, 임기, 분천, 승부, 동점 등 7개소에 공사사무소를 설치하여, 교량 55개소, 터널33개소, 급수시설 2개소 등 공사에 교통부원 연 57,681명, 공병대 1개대대 연 30,000명, 노무인력 연 4,722,610명이 투입되었다.   

 

영주~내성 간 14.1㎞는 6.25전쟁 전 1950년 2월 1일 이미 완공되었고, 내성~거촌 간 5.5㎞는 1954년 2월 1일, 거촌~봉성 간 5.5㎞가 개통되었고, 1954년 6월30일 춘양역사가 준공되고, 1955년 2월 1일, 봉성~춘양 간 12.1㎞, 1955년 7월 1일, 춘양~철암 간 49.2㎞는 1955년12월30일 준공되어 영주~철암 간 86.4㎞ 전 구간을 개통시켰다.  

▲1955.1.16일 영암선 전 구간 개통식에 참석한 지원군 부대원

 

특히 높이 20,691m의 춘양곡천교량, 해발 450m에 위치한 춘양~현동 간 임기1터널과 춘양터널 및 급커브에 암석 질이 조악한 봉성~춘양 간 풍정터널 공사 등은 특히 어려웠다. 

 

정부에서 영암선 건설을 국가의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공사기간의 최대한 단축을 요청하면서 육군 제210공병대와 철도운영대 및 철도수송대의 트럭과 중장비의 지원과 병력지원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애석하게 터널 낙반사고 등으로 24명의 고귀한 인명이 희생된 영암선 건설공사 과정 에서 ‘억지춘양’이라 할 만한 사연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용 면에서도 1992년 영암선 11개역 중 시·종착역을 제외하면 1일 승강 인원이 가장 많은 507명의 주요 역으로 처음부터 설계된 역으로 공사 도중에 억지로 추가 설치한 역은 아니었지만 춘양역이라는 이름에서 그 사연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은 같은 이름을 사용치 않는다. 예로 1931년 개통된 경북선 ‘풍산역’은 1917년 개통된 함북선에 풍산역이 있어 ‘경북풍산역’으로, ‘안동역’은 중국철도에 ‘안동역 ’(1965년 단둥역으로 변경)이 있어 ‘경북안동역’으로 역명을 결정한 사례가 있다.

▲ 고시416-417호

위 사례와 같이 ‘춘양역(春陽驛)’은 이미 경전선에 있어 사용할 수 없었음에도 1955년 6월28일 교통부고시 제416호로 「7월 1일부터 영암선 ‘춘양역’ 영업을 개시한다.」는 발표를 한 바로 다음날인 6월29일 교통부고시 제417호로 수 십 년간 춘양역으로 이용되던 「경전선 춘양역을 7월 1일부터 ‘석정리역’으로 개정한다.」는 고시를 한 것에 대하여 춘양역 이름을 억지로 변경하고, 또 억지로 사용하게된 것을 탓하는 의미의 ‘억지춘양’이라했을 당시의 속어가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엉뚱하게도 지역을 위한 정치인의 치적을 자랑하는 의미로 변질된 것이라 판단된다. 

 

아무리 혼란했던 시기지만 한분 국회의원 힘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철도노선의 변경은 불가능해도 이름을 바꿀 정도의 압력은 가능했으리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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